우치다 타츠루 강연 지극히 주관적인 요약 정리2
페이지 정보
- 김용훈(van***)
- 2014-06-26
- 3,034
- 메일 보내기
본문
20140625 우치다 타츠루 강연(대방동 여성플라자)) - 어른이 없는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
1. 딸과 어머니의 갈등을 다룬 드라마가 가장 인기있다. 거기서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문제제기하였는데 그 작품에서 아버지는 생사조차도 알수없는 존재였다. 그만큼 아버지의 존재는 무존재에 가깝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다룬 작품은 현재는 거의 존재하지 않게되었다.
2. 부모자식관계는 개인적 성향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가족은 사회적으로 정해진다. 아들이 아버지를 존경해야하는 사회분위기에선 반드시 아들이 아버지를 존재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친족의 기본구조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이야기이다. 어떤 사회든 자신의 고유한 친족체계가 있다. 친족관계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시대는 아버지에게 존경을 표하지않아도 되는 사회인 것이다. 딸과 어머니의 관계 중심인 사회에서는 아버지의 존재는 중요치 않다. 아버지의 인간적 매력, 사회적 위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의 품성, 능력은 가족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된다.
3. 이러한 것은 1960년대 시작된 반부권제라는 사회적 분위기이다. 60년대는 중국 문화혁명, 베트나 전쟁 등 전세계적인 혁명의 시기인다. 1960년대 자체가 반권력 투쟁의 시기였다. 이는 반부권제와 연결된다. 이 시기는 30세 이상의 사람을 믿지마라는 흐름이 있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반부권제의 원인은 모르나 그것이 완료된 시점이 되었다.
4. 아버지가 아들에게 성숙 모델이 되지 못하게 된 것은 중요한 지점이다. 오늘의 주제인 어른이 없는 사회는 우리가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이다. 반부권제는 남녀의 성평등과 동일선상에 있다. 80년대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와 남녀 간의 차이가 점점 줄어들었다. 1985년 남녀평등고용법이 시행된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의 고용기회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 주체로서의 남녀의 균일화라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남녀의 욕망을 균일화된 사회를 만들려는 경제계의 의도였다. 이러한 경제계의 의도는 사회구성원의 균일한 욕망일수록 생산비용은 준다. 곧 소비자의 욕망이 균일화되는 이상적인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5. 사람은 2가지 부류로만 정리된다. 하나의 직종에 응모자가 많을수록 고용의 조건은 낮아진다. 남녀가 동일한 직종에 지원하게 됨으로서 저비용으로 고용할 수 있게 된다. 곧 고용주는 피고용인을 언제든 바꿀 수 있다. 이러한 경제계의 의도가 시작되면서 동시에 가족이 해체되기 시작한다.
6. 시장의 입장에서 가족은 가장 소비가 활성화되지 못하는 집단이다. 가족이 긴밀할수록 소비는 어려워진다. 아버지가 돈을 벌어와도 그 돈은 가족의 것이며, 소비를 위해서는 가족의 협의가 필요했다. 가족의 동의가 없으면 소비활동을 일어나지 않는다. 가족의 규모가 커지고, 가족간의 유대가 강할수록 시장의 입장에선 소비가 위축된다. 소규모일수록 소비를 위한 협의가 간닪해진다. 가장 쉬운 것은 가족 자체가 없고 나 혼자 벌어 쓴다는 생각. (아버지가 갑자기 벤츠가 사고 싶다. 헌데 부인과 아들은 냉장고나 자전거를 사달라고하거나 그 정도 벌어서 무슨 벤츠냐는 핀잔. 분수에 맞게 소비해라는 사회적 합의도 가족이 해체되기 전에는 있었다)
7. 현재는 자신이 벌어 소비하면서 분수에 넘치는 소비를 하고 있으며 이를 멈출수없다. 일본의 80년대 거품경제는 가장 소비가 활발한 시기였으며, 이 시기가 바로 가족이 가장 활발히 해체되던 시기이다. 이는 조장한 것은 미디어의 '자기다운 삶의 방식'을 살자는 요구이다. 생활의 모든 것들, 자기가 원하는 집, 자기가 원하는 인테리어, 자기가 원하는 음식, 음악 등을
당신다운 삶을 살아라는 말, 자기다움을 표현하라는 말은 바로 소비활동이다. 당신다운 음식을 먹어라. 당신다운 차를 타라, 당신다운 휴양지를 가라.
8. 4인가족은 하나의 집이면 되지만 흩어지면 집, 냉장고, 티비, 자동차, 전화도 모두 4개가 필요해진다. 가족의 해체는 시장의 확대가 된다. 이게 바로 1980년대 일본의 현상이다. 가족이 해체되고 자기의 삶의 결정을 자기가 하라는 것은 소비를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9. 가족공동체서 서서히 합의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파행되었다. 의사결정은 가족의 필수요소였다. 가족이 친밀하던 시기에는 아이에게 성숙의 기회가 있었다. 연장자(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이렇게 살아야해..라는 지시의 방식이 달랐기 때문에 가능했다. 통일되지 않은 그러한 제시는 아이에게 오히려 자유를 준다. 그리고 아이는 갈등하는 상황에서 성장한다. 곧 이 어른들이 이렇게 달리 말하는데 대체 나더러 어떻게 살라고 하는거냐는 고민을 하면서 성장한다.
10. 부권 시대에서 아이의 삶은 아버지가 결정했다. 전쟁 전 모든 권력은 아버지에게 있었다. 재밌는 것은 그러한 아버지에게 집중된 권력행사, 결정권은 항시 틀렸다. 아버지의 결정은 아이의 욕망에 체계적으로 틀리고 있었다. 아이의 욕망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어머니였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아버지에게 다시 전달하는 구조였다. 헌데 어머니는 아이의 선택에 대한 결정권을 쥐지 못했다. 항상 아이의 욕망과 상반되는 결정을 하는 아버지만 존재했다. 그 당시 아이들은 아버지들이 나의 바람과 다르게만 요구한다는 공통적인 상황에 놓였다. 아버지는 아이의 욕망을 잘모르고 있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
=> 이런 상황에서 아이는 어떻게 하면 나를 잘못 보고 있는 아버지, 내 결정권을 가진 아버지를 넘어서 내 뜻을 실현할까하는,거대하지만 틀린 존재를 넘어서는 것이면 충분했다. 어찌보면 단순한 방식이다. 이게 부권제의 아이의 성장의 배경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아버지가 아들을 잘모르고 결정할수록 아이는 성장하는 시스템이었다. 부모가 부족할수록 아이의 성장의 계기가 되는 사회였으며 이는 문학작품에 반영되었다. 절묘한 밸런스가 유지되며 아이의 성장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11. 반부권제 사회에서 아버지는 아이에 대한 결정권이 없어졌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아이의 욕망을 잘 모른다. 그 대신에 아이의 성장을 담당하는 것은 어머니가 된다. 아이의 욕망, 약점, 성향을 알고 있다. 어머니의 기본적 육아 전략을 내아이는 약하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내 아이가 살아남을까로 집중된다. 그래서 가장 좋은 선택은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정서이다. 약한 존재인 아이들 다수가 속한 곳에 보낸다. 그래야 아이가 최악의 상황을 맞을 확률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 기본 존재는 아이들은 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큰 집단에 가서 최악을 상황을 맞을 확률을 줄이고, 다른 이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하도록 한다.
12. 과거 아버지의 육아전략과 현재 어머니의 육아전략을 결코 섞일 수 없다. 아버지는 우리 아이는 잘한다. 집단에서 두드러지길 바라나, 어머니는 우리 아니는 약하다. 집단에서 두드러지지 말아야한다.는 입장이다. 이 두 입장 속에서 아이는 갈등하며 고민한다. 아버지의 권한이 사라지면서 아이는 망설이는 권한을 잃어버렸다. 예전에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하면 아버지는 격노, 어머니는 이해였는데 지금은 격노하는 아버지가 사라졌다. 어머니는 아이에 대해 숙지하고 있다. 그 선택이 자발적인지까지 감안한다. 티비 때문인지, 그냥 청소년기의 따라하기인지 걱정하고 진찌 네 생각이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아이는 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냥 다른 이를 흉내내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14. 위와 같은 흐름은 큰 집단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합리화. 독자적인 행보를 하겠다면 그건 누군가를 흉내내는 것은 아니냐며 반대. 특히 딸에 대해서 딸의 욕망과 약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어머니는 아이의 선택에 있어 매우 결정적이다.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자신의 진로의 결정권이라는 것은 비극이다. 이런 부모와는 싸울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를 잘 알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내가 알고 있는 이상을 어머니는 알고 있다. 아이는 반항할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인류역사상 처음있는 일이다.
15. 아이의 성장이 어려워진 이유는 반부권제의 등장, 가족의 해체, 남녀노소 모두의 욕망을 균일화 시키는 소비문화이다.
16. 어머니가 전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딸보다 아들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딸은 어머니를 성숙 모델로 삼을 수 있다. 헌데 아들은 아버지를 성숙모델로 받아들일까? 돈벌어 가족을 부양하나 인정받지 못하는 아버지처럼 왜 살아야하는가?
17. 이러한 부권이 상실된 아버지의 존재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성숙에 관한 문제제기가 지난 50년간 없었지만 이제는 성숙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진다. 가족이 해체되고도 사람들이 살만햇던 것은 그만큼 평화로운 시대였다는 것이다. 혼자서 생활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그걸로 충분했다는 것이다. 1인 가족이 살 수 있는 소비문화가 존재한다. 그러한 사회와 소비문화가 아니라면 누구도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안전하고 윤택한 사회는 사람들이 미성숙해도 살 수 있다. 성숙이 없고 모두가 아이와 같은 사회이다.
18. 표준화된 능력을 가진 노동자들이 수만명 양산되는 사회. 서로가 미성숙한데 서로의 미성숙이 전혀 위화감이 없는 사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사는 지금 사회는 안전하지도 않게 되었는데 여전히 우리는 미성숙하다. 헌데 그것은 지난 50년간 우리가 선택하고 만들어온 사회이다. 그리고 성숙한 어른이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19. 그러면 어떻게 미성숙한 사회에서 아이의 성숙을 이끌어 낼 것인가? 이 문제설정은 틀렸다. 아이의 성장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은 없다. 아이는 갈등을 통해 성장한다. 다양한 성숙 프로그램을 통해서만이 아이는 성숙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친족 체계. 아버지가 엄격한 사회에서는 외삼촌이 아이를 달램으로 어른의 역할이 생긴다. 어머니와 아들이 친밀한 경우는 외삼촌이 남자다움을 알려준다. 최소한 3개의 육아전략이 아이의 성장에 필요하다.
20. 다양한 육아전략을 가진 사람들이 아이의 성장을 위해 곁에 있어야 한다. 아이의 성숙을 이끄는 것은 복수의 인간의 공동의 작업이지 단일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는다. 똑같은 권한을 가진 복수의 어른이 아이와 관계를 가지지 않으면 성장을 일어나지 않는다.
21. 이것은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복수의 교원이 하나이다. 아주 옳은 교수법을 가진 한명의 교사는 존재할 수 없다. 교수전략이 다르고, 아이에 대한 기대가 다르고, 아이에게 명령하는 것이 다른 교사들이 하나의 교사가 된다. 좋은 교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좋은 교사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다양한 성향의 교사가 모여있는 것이 좋은 교사(교육)이다. 하나의 옳은 교육방법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절대 반대한다. 한 명의 좋은 교사가 있다는 전제는 성립할 수 없다. 단일한 프로그램으로 모든 교사가 아이에게 적용하려 한다면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이는 학교와 가정 모두에게 통용된다.
22. 핵가족화로 아버지, 어머니, 아이로만 그치는데 친족이 없는 상황에서 친족의 역할을 하는 것이 교사이다. 그래서 교사는 아버지, 어머니가 말하는 것과 반대로 말해야한다. 학교 교사가 부모와 같은 전략을 삼은면 이것은 아이의 성장을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것과 같다.
23, 어른이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하는 질문에서는 대답이 없는게 대답이다. 혹은 모두가 다른 대답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두가 다르게 이야기하지만 모두가 성숙해야함을 이야기해야한다. 성숙이라는 것은 도달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아이에게 어른이 가진 것과 같은 목표가 있을리 없다. 성숙이란 것은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 지를 모르는 것이다. 여기저기 나를 부르는 길을 밟아 나가는 것이다. 살다보니, 걸어가보니 내가 참 유치했구나, 아이였구나하고 돌아보는 것이 성숙이다. 내 지나온 시간과 상황을 객관화시켜 바라보며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전에 했던 행동의 의미를 확정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아무리 의미있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과거의 경험으로서 현재에 비추어 새로운 의미를 갖는 것이 성숙이다. 트라우마는 과거의 경험이 확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시계의 바늘이 멈춰있다고 말한 것.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멈춰진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숙의 반대말은 미성숙이 아니라 트라우마이다.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하더라도 과거 자신의 경험의 의미가 바뀌지 않는 것. 그것이 미성숙이다.
24. 트라우마를 어떻게 빠져나갈까? 자신의 어린 시절 설계대로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트라우마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몇살 때 졸업하고, 몇살 때 직장에 들어가고, 몇살에 결혼하고... 등등을 계획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트라우마적 삶이다. 유아적인 결정대로 살아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25. 보통 성장의 프로세스는 앞을 보고 나아가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한발짝 걸어갈 때마다 지나온 걸음의 의미가 달라진다. 어떻게하면 뒤를 돌아볼까? 등으로 느끼는 것이다. 자신을 부르는 것이 있다. 종교적 표현으로 소명. 보이지 않지만 부르는 소리. 등을 향해 나를 부르는 소리. 그걸 향해서 걸어가는 것. 다양한 복수의 음성이 앞으로 걸어가는 나를 부른다. 성장하는 아이는 그러한 뒤에서 들리는 여러 소리 중에서 자기가 따라가야할 길을 선택해가는 아이이다. 하나의 목소리만 들리고, 그것만 따라가는 아이는 성장하지 않는다.
26. 이 시대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집단을 만들고 서로가 서로를 지원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시대이다.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시대. 성숙은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과 생각, 느낌이 달라도 함께 살아가는 것이며 그러한 지혜와 힘을 성숙이라 한다. 타자와 공생할 수 없는 사람들은 살기 힘든 시기가 될 것이니 아아의 성숙을 바란다면 아이에게 복수의 목소리를 들려주어야 한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절대 이런 사람이 되라고 결정해주지 마십시요. 다양한 목소리가 들리게 해주는 것이 아이를 살리는 것이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나는 하나의 내가 아닌 다양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내 안의 다양한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사람이 되어야만 타자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자기 안의 게으름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타자의 게으름을 용서할 수 있다. 자신의 나쁜 점을 용서하는 사람만이 타자의 나쁜 점을 용서할 수 있다. 어머니들은 아이에게 겉으로 보이는 네 모습 외에도 다른 모습도 너에게 있을 수 있다고 말해주어야합니다. 아이의 성장은 사회 모든 구성원의 몫이다.
27. 자기가 믿고 있는 것들을 다양한 어른들이 알려주는 것. 아이를 깊은 혼란과 갈등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이를 성장시킨다. 오히려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아이를 성장시킨다는 것이 아이의 성숙을 막는다. 쉽게 말해 모두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아이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성숙지원 프로그램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특출난 사람이 구안한 하나의 완벽한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것이 아니다. 성숙을 위해 가장 방해되는 것은 모두의 의견을 합치자는 것이다. 저런 말도 안되 소릴 하고 있구나 하는 그것이 아이의 성장을 가장 잘 도와주는 것이 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질문1 - 무기력한 아이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 공부를 안하면 자신만 곤란한 사람은 공부하지 않는다. 공부를 안하면 다른 사람이 곤란해지면 안할 수가 없다. 아이들끼리 만든 집단에 아이를 둔다면 그 속에서 공부를 안할 수 없다. 폐쇄적인 집단에서 경쟁은 전체의 역량이 떨어지면 내가 탁월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개인은 살지만 집단은 죽는다. 그런데 집단이 살기위해서는 내가 가진 능력과 집단 전체의 역량이 높을수록 생존할 활률이 높다. 집단의 생존확률이 높을수록 나의 생존확률도 높다. 그래서 그 집단 내에서 내가 미기력하면 집단이 무기력해지며, 곧 다른 사람이 곤란해진다. 거기에 더해서 집단 내에 다양한 분야의 능력을 가진 이들이 각자의 역량을 키우게 된다. 만약 무기력하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러한 집단에서 소외되었다는 것이다.
질문2 - 어른이 아닌 아이의 입장에서 강연을 들었다. 다양한 목소리가 들려야한다고 하시는데 요즘 수많은 강연에서 학생들이 열광하는 강사들은 자신의 길을 가라고 하는데, 가정에 가면 다시 부모들로부터 일반적인, 넓은 길로 가라고 한다. 아이들도 그런 것을 잘 아는데 실천에서 막힌다. 아이들은 고민만 할 뿐 실천은 못한다. 권력이 있는 사람이 다르게 말해야 아이는 성숙한다고 하셨는지만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아이들은 두려움 때문에 고민은 하되 실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당사자의 문제이다. 비슷한 또래의 멘토가 중요하고 그런 일들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진로 결정권이 없는 이들의 도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 멘토가 필요하다. 헌데 멘토는 사잇배와 같은 것이다. 이 배에서 어느지점까지 간 뒤에 다른 배로 옮겨타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멘토라는 것은 사실 아이가 지난 뒤에서야 그 사람이 멘토 역할을 했구나 알 수 있는 것이며, 어쩌면 멘토 자신도 자신이 아이의 멘토였다는 것을 모른 채 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어떤 시기에 만난 누군가가 나의 멘토였구나하고 나중에 알게되는 것이다.
방외인 왈..
1. 어른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아이에게 다가가서 부딪히고 혼란스럽게 하는 것에서 아이의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여기서 전제는 어른들은 다양한 태도와 생각과 자신만의 관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어른들의 관점과 태도 그가 살아가는 세상의 주요문화와 시스템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다양성을 지향해야한다고 하지만 사실 문화와 시스템의 기반이 같기 때문에 사실상 유사한 어른들이 많은 것은 아닐까? 결국 전제인 다양한 성향의 어른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다.
2. 성장을 이끄는 하나의 프로그램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프로그램 자체보다는 그 프로그램은 운영하는 사람이 다양하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다양성의 작용이 되지 않을까? 프레네, 발도로프, 배움의 공동체 등 다양한 실천적 교육철학들이 현재 우리 나라의 교실에서 이루어지려고 한다. 우치다 선생의 이야기로는 전면적으로 하나의 교육철학만 적용하는 것은 성장을 이끌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일까?
3. 우치다 선애의 책을 읽을 때 종종 느끼는 것이지만 아이들을 주체적 존재로 보기보다는 일면 수동적 존재로 상정하는 것 같다. 전통회귀론자처럼 보인다는 이야기에 전통의 옹호가 아니라 급격한 변화를 지양한다고 말한 것에 합리적 보수주의자의 면모가 있다고 생각된다. 현대적 현상, 자본주의가 압도적인 지배이념이 된 현대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지만 기본적으로 진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비판적 지성, 어떤 현상에 있어서 역사의 중요성, 맑스주의에 기반한 경제적 관점에서 현상 해석, 주류 인식론을 뒤엎는 전복적 사고, 관점의 일탈(?) 등 내가 기존에 알던 생각의 흐름을 뒤엎거나, 넘어서거나, 되돌리는 다양한 흥미를 안겨준다.
댓글